
구글 터보퀀트 알고리즘 발표 하나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주가가 일제히 흔들렸다. AI 효율이 높아지면 메모리 수요가 줄어든다는 논리가 시장을 강타한 것이다. 하지만 씨티그룹 리서치의 이세철 전무는 이 우려가 과도하다고 본다. 그의 시각은 명확하다. 지금 AI 반도체 사이클은 9회 중 겨우 2회차에 불과하고, 앞으로 최소 7년의 호황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작년 딥시크 쇼크가 터졌을 때 나는 보유하고 있던 반도체 관련 주식을 절반 정도 매도했다. AI 효율이 높아지면 메모리 수요가 줄어든다는 논리가 그럴듯하게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달 지나지 않아 주가가 회복되는 것을 보면서 그 결정을 후회했다. 문제는 내가 개별 기업의 펀더멘탈이 아니라 뉴스 헤드라인에 반응했다는 점이었다. 이번 터보퀀트 이슈를 접했을 때도 처음에는 비슷한 불안감이 들었다. 하지만 이전 경험을 떠올리며 이번에는 먼저 구조적 흐름을 따져봤다. 같은 상황에서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건 이전 실수에서 배운 덕분이었다.
슈퍼사이클의 근거와 메모리 수요 구조
터보퀀트 발표 이후 시장의 논리는 단순했다. AI 연산 효율이 높아지면 메모리를 덜 써도 되고, 그러면 메모리 수요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언뜻 그럴듯하게 들린다. 하지만 이세철 전무는 이를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는 2010~2011년 삼성전자 마케팅 부서 재직 당시 클라우드 컴퓨팅이 확산되면서 똑같은 우려를 했던 경험을 꺼냈다. 서버에서 컴퓨팅을 처리하면 PC나 스마트폰의 메모리 용량을 늘릴 필요가 없어진다는 논리였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컴퓨팅 가격이 낮아지면서 수요가 폭증했고, 2016년부터 2019년까지 강력한 서버 사이클이 왔다.
이것이 바로 제번스 역설이다. 효율이 좋아지면 사용량이 줄 것 같지만, 실제로는 진입 비용이 낮아지면서 더 많은 수요가 생긴다. 터보퀀트로 AI 운영 비용이 낮아지면 더 많은 기업이 AI를 도입하고, 더 많은 서비스가 만들어지면서 메모리 수요는 오히려 늘어난다는 것이다. 실제로 오늘 주가 조정 폭이 작년 딥시크 쇼크 때보다 훨씬 작다. 시장이 이 패턴을 학습하고 있다는 신호로 읽힌다. 제번스 역설, 클라우드 컴퓨팅 사례, 실제 메모리 수요 데이터를 확인하고 나서야 이번 하락이 매도 신호가 아니라 오히려 분할 매수를 고려할 구간일 수 있다는 판단이 섰다.
장기 계약과 밸류에이션 변화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주목할 부분은 메모리 산업의 구조적 변화다. ARM이 AI CPU 시장에 진출하면서 모바일 D램 수요가 새롭게 열리고 있다. 엔비디아가 올 하반기 출시할 베라 루빈의 경우, GPU에는 288GB HBM4가 들어가지만 CPU에는 무려 1.5TB의 메모리가 들어간다. GPU 중심의 HBM 수요에 더해 AI CPU용 모바일 D램이라는 새로운 수요처가 생기는 것이다.
더 중요한 변화는 메모리가 맞춤형으로 진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언어 모델, 사고 모델, 대화 모델에 각각 최적화된 메모리가 필요해지면서 메모리 업체들이 단순히 범용 제품을 찍어내는 시대는 끝나가고 있다. 이세철 전무는 이를 '세미 커스터마이즈'라고 표현했다. 파운드리처럼 고객 맞춤형 제품을 설계하고 공급하는 방향으로 산업이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장기 계약 확대도 구조적 변화의 신호다. 마이크론의 5년 장기 계약 체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유사한 논의는 고객사들이 향후 5년간 안정적인 메모리 공급이 필요하다고 판단한다는 뜻이다(출처: 산업통상자원부). 이 흐름은 메모리 업체들의 가치 평가 기준을 PBR에서 PER로 바꾸는 리레이팅 스토리로 이어질 수 있다. 다운턴에서 적자를 내던 산업이 장기 계약으로 하방 경직성을 갖추면, 소프트웨어 기업처럼 안정적인 이익을 창출하는 구조로 평가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리스크와 투자 전략
이번 인터뷰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7년 슈퍼사이클이라는 전망 자체보다, 그 전망에 딸려 오는 리스크를 전문가 스스로 명확하게 제시했다는 점이다. 빅테크 설비투자 감소, AI 플레이어 수 감소, 스마트폰·PC 수요 약화. 이 세 가지 시나리오가 현실화되면 7년 사이클이라는 큰 그림도 흔들릴 수 있다고 직접 경고했다. 이런 균형 잡힌 시각이 오히려 신뢰를 높인다. 반면 시장에 넘쳐나는 강세론 일색의 전망들은 리스크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경우가 많다. 좋은 점만 부각하고 나쁜 시나리오는 축소하는 방식이다. 투자자 입장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이 바로 이런 편향된 정보다.
소부장 업체 투자 시점도 냉정하게 볼 필요가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대규모 투자가 실제 집행되는 시점은 2027년 이후다. 지금 당장 소부장 업체에 몰려드는 자금이 실적보다 기대감에 앞서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섣부른 진입보다는 실제 수주 모멘텀이 확인되는 시점을 기다리는 것이 더 현명한 접근일 수 있다. 방향성을 믿되, 포지션 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 지금 반도체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이다.
📌 요약
터보퀀트 이슈로 메모리 주가가 흔들렸지만 씨티그룹은 우려가 과도하다고 본다. AI 반도체 사이클은 9회 중 2회차에 불과하고, 제번스 역설에 따라 효율 향상이 오히려 수요를 늘릴 가능성이 높다. 메모리의 맞춤형 진화와 장기 계약 확대는 PBR에서 PER로의 가치 평가 전환을 이끌 구조적 변화다. 다만 빅테크 설비투자 변화와 AI 플레이어 수 감소는 핵심 리스크로, 소부장 업체는 실제 수주 모멘텀이 확인되는 시점을 기다려 접근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본 글은 투자 권유가 아니며, 투자 판단과 그에 따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