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를 열어보는 게 두려웠던 날이 있었습니다. 원달러 환율이 1,500원을 넘어섰다는 뉴스가 쏟아지던 그 주, 저는 오히려 국내 자산만 들고 있는 지인들이 더 걱정됐습니다. 환율이 오르는 게 무조건 나쁜 소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그때 처음 실감했거든요.

환율이 오르는 진짜 배경, 뉴스 너머를 봐야 합니다
환율이 오른다고 하면 대부분 "미국이 금리를 올려서", "엔화 약세 때문에"라는 말을 먼저 떠올립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저는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공부하면서 알게 됐습니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었습니다.
M2, 즉 광의통화량이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M2란 현금은 물론 예금, 단기 금융상품까지 포함한 넓은 의미의 시중 유통 통화량을 의미합니다. 2001년부터 최근까지 약 25년간 미국은 GDP가 40% 가까이 성장하는 동안 M2는 약 17% 늘었습니다. 반면 한국은 같은 기간 GDP가 약 19% 성장하는 데 그쳤는데, M2는 약 29%나 증가했습니다. 경제가 크는 속도보다 돈이 훨씬 빠르게 풀렸다는 뜻입니다.
돈이 넘쳐나면 그 돈의 가치는 떨어집니다. 이건 물건 가격의 논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원화가 구조적으로 약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 이미 수년 전부터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얘기인데, 저는 이 데이터를 보고 나서 환율 뉴스를 바라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 요인이 더 붙습니다. 한국은 수출과 수입을 합치면 GDP의 95%에 달할 정도로 대외 의존도가 극도로 높은 나라입니다. (출처: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그 말은 수출 기업들이 달러를 벌어도 해외 투자 의무 등으로 원화로 바꾸지 않고 그대로 들고 있는 상황이 벌어지면, 원화 수요 자체가 줄어들면서 환율이 더 오를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실질실효환율이 말해주는 원화의 현재 위치
실질실효환율이라는 지표가 있습니다. 여기서 실질실효환율이란 물가 상승률까지 반영해 여러 나라 통화와의 교환 가치를 종합적으로 계산한 수치로, 한 나라 돈의 실제 구매력을 보여주는 척도입니다. 100을 기준으로 그 이상이면 고평가, 이하면 저평가 상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미국 달러의 실질실효환율은 2010년대 초반 저점을 찍은 뒤 꾸준히 올라왔습니다. 반면 원화는 2017~18년 무렵 단기 고점을 찍은 뒤 지금까지 내리막입니다. (출처: Bank for International Settlements) 이 추세를 보면 단순히 "요즘 환율이 높네"가 아니라, "원화의 절대적 가치 자체가 장기적으로 하락하고 있구나"라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미국의 분기 GDP 성장률이 2.1%를 기록하는 동안 한국은 1.7%에 머물렀습니다. 신흥국이 선진국보다 빠르게 성장해야 통화 약세를 방어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 반대입니다.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반도체 수출이 호조라는 뉴스를 들으며 괜찮겠거니 했는데, 거시 지표를 직접 들여다보니 생각보다 구조적인 문제가 깊었습니다.
연준, 즉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정책 금리도 이 흐름에 기름을 붓고 있습니다. 여기서 연준이란 미국의 중앙은행 역할을 하며 기준금리를 결정해 전 세계 달러 유동성에 영향을 미치는 기관을 말합니다. 현재 미국 정책 금리는 3.75%, 한국은 2.5%입니다. 1.25%포인트 차이가 나는데, 이 차이가 유지되거나 벌어질수록 글로벌 자금은 자연스럽게 달러 표시 자산으로 흘러갑니다. 결국 환율은 심리가 아니라 돈의 흐름이 만들어낸다는 말이 이래서 설득력을 얻습니다.
지금 이 환율 수준, 달러 자산을 어떻게 볼 것인가
"환율이 이렇게 높을 때 달러를 사면 손해 아닐까요?"라는 질문을 주변에서 자주 받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처음 해외 투자를 시작할 때는 좋은 타이밍을 잡아야 한다는 압박이 컸거든요. 그런데 제가 직접 계좌를 열어 몇 년치 수익률을 추적해 보니, 환율을 예측해서 타이밍을 잡으려던 시도보다 꾸준히 분산해서 들고 있는 편이 훨씬 결과가 좋았습니다.
달러 자산을 보유하면서 느낀 변화를 솔직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국내 증시가 흔들리는 날, 달러 자산이 완충재 역할을 했습니다.
- 환차손 걱정은 했는데, 막상 장기 보유하니 환차익 구간이 더 길었습니다.
- 환율을 예측하려는 시도를 포기하자 오히려 판단이 단순해졌습니다.
물론 환율 전망은 어느 전문가도 정확히 맞히지 못합니다. 1,550원이 고점일지 1,600원을 향할지 누구도 단언하기 어렵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른데, 특정 환율 수준을 보고 사고팔고를 반복하는 것보다, 내 자산에서 달러 표시 자산이 차지하는 비중 자체를 일정 수준 유지하는 전략이 훨씬 마음이 편했습니다.
우리가 사는 경제 환경 자체가 이미 글로벌과 깊이 연결돼 있습니다. 개인 포트폴리오도 그 현실을 반영하는 게 맞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환율이 오를수록 달러 자산의 가치는 원화 기준으로 올라가고, 이건 결국 리스크 헤지, 즉 위험 분산의 역할을 합니다. 예측이 아니라 구조를 바꾸는 것, 그게 지금 시점에서 개인 투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대응이라고 봅니다.
본 글은 투자 권유가 아니며, 투자 판단과 그에 따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