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한테 "야, 이 주식 그냥 사" 라는 연락을 받아본 적 있으신가요. 저도 그랬습니다. 한미반도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뭐 하는 회사냐고 물었더니 상대방도 잘 모른다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냥 넘겼다가 나중에 주가가 크게 오른 걸 확인하고 아차 싶었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합니다. 그때부터 이 회사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알면 알수록 단순한 종목 이상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습니다.

반도체 불모지에서 세계 1위까지, 후공정 장비의 핵심
반도체 산업은 크게 전공정과 후공정으로 나뉩니다. 전공정이란 웨이퍼라고 불리는 실리콘 기판 위에 회로를 새기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반면 후공정이란 그 웨이퍼를 개별 칩 크기로 잘라내고, 외부 충격으로부터 보호하는 패키징을 거쳐 최종 제품으로 완성하는 단계입니다. 한미반도체는 이 후공정 가운데 소잉(Sawing)과 플레이스먼트(Placement) 분야에서 세계 시장을 이끌고 있습니다.
소잉이란 다이아몬드 날로 웨이퍼를 개별 칩으로 정밀하게 잘라내는 공정을 말합니다. 이 공정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웨이퍼 위에 새겨진 수백 개의 칩이 한꺼번에 폐기됩니다. 불량이 허용되지 않는 핵심 공정인 만큼, 장비의 정밀도와 속도가 곧 경쟁력입니다. 한미반도체의 소잉 장비를 도입한 공장에서는 경쟁사 대비 생산량이 30% 이상 증가한다는 평가가 실제 현장에서 나왔습니다.
1997년에 출시된 소잉 앤 플레이스먼트(Sawing & Placement), 그리고 1998년에 뒤이어 나온 비전 플레이스먼트(Vision Placement)는 절단과 세척, 검사, 분류를 하나의 장비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제품이었습니다. 여러 공정을 단일 장비로 통합한다는 것은 반도체 제조사 입장에서 공정 시간이 줄고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오른다는 의미입니다. 이 두 제품을 결합한 마이크로 소 비전 플레이스먼트(Micro Saw Vision Placement)는 2004년부터 21년 연속 전 세계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가 이 수치를 처음 봤을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21년이라는 기간은 경쟁사들이 여러 차례 추격을 시도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요.
창업주 곽노권 회장이 1979년 차고에서 시작해 국산화를 이뤄낸 이 회사가 반도체 후공정 장비 분야에서 어떻게 세계 1위가 됐느냐는 질문에, 저는 "세계 1등이 아니면 죽는다"는 창업 정신보다는 그 실행력에 더 주목하고 싶습니다. 좋은 철학을 가진 회사는 많지만, 삼성전자, 현대전자, TSMC, 인텔 같은 고객사가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장비를 21년째 유지하는 회사는 많지 않습니다.
한미반도체의 주요 경쟁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마이크로 소 비전 플레이스먼트: 2004년부터 21년 연속 세계 시장 점유율 1위
- 전체 매출의 약 80%가 해외에서 발생하는 수출 중심 구조
- TSMC, 마이크론 테크놀로지 등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를 주요 고객으로 보유
- 2021년 마이크로 소(Micro Saw) 핵심 부품 국산화 성공으로 마진율 개선
삼성 특허 소송부터 TC본더까지, 기술 확신이 만든 슈퍼 을
제가 한미반도체를 공부하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실적 숫자보다 삼성전자와의 소송이었습니다. 2011년, 한미반도체는 삼성전자 장비 계열사가 자사 특허를 침해했다고 소를 제기했습니다. 장비 공급 업체가 완성품 대기업을 법정에 세운 이 사건은 업계에서 전례가 없는 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리고 한미반도체가 승소했습니다.
기술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이런 결정을 내리기 어렵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고객 중 하나를 잃을 수 있는 리스크를 감수하면서도 특허 침해는 용인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니까요. 그 결과 삼성전자와의 거래 관계는 냉각됐지만, 한미반도체는 굴하지 않고 기술 개발을 이어갔고 오히려 글로벌 고객 기반을 더 넓혔습니다. 최근에는 삼성과도 협력 가능성이 다시 거론될 정도로 위상이 달라졌습니다.
그 기술력이 집약된 제품이 2016년에 등장한 TC본더(TC Bonder)입니다. TC본더란 열(Thermal)과 압력(Compression)을 동시에 가하여 반도체 칩을 수직으로 쌓아 붙이는 장비를 말합니다. HBM(High Bandwidth Memory)을 만들 때 핵심이 되는 공정 장비입니다. 여기서 HBM이란 여러 개의 D램 칩을 수직으로 적층하여 기존 메모리보다 데이터 처리 속도를 획기적으로 끌어올린 고대역폭 메모리로, 엔비디아 GPU의 필수 부품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반도체 미세 공정이 한계에 다가오면서 업계는 칩을 더 작게 만드는 대신 위로 쌓는 적층(Stacking) 방식으로 성능을 높이는 방향을 택했습니다. HBM은 현재 8단에서 12단, 16단으로 세대가 올라가고 있는데, 층수가 높아질수록 각 층마다 적용해야 하는 온도와 압력 조건이 달라집니다. 이 데이터가 한미반도체에 가장 많이 축적되어 있다는 점이 경쟁사들이 단기간에 추격하기 어려운 이유입니다. 제 경험상 투자에서 이런 '데이터 축적의 해자'는 특허보다 더 강력한 진입 장벽이 됩니다.
TC본더 시장에서 한미반도체의 점유율은 약 70%에 달합니다(출처: 한국거래소 기업공시). AI 인프라 투자가 지속되면서 HBM 수요는 꾸준히 늘고 있고, HBM4를 넘어 HBM5, HBM6에 대한 논의까지 이미 업계에서 시작됐습니다. 반도체 시장 성장에 따른 장비 수요를 분석한 보고서에서도 후공정 패키징 장비 분야의 성장률이 전공정 대비 높게 전망되고 있습니다(출처: 한국반도체산업협회).
다만 냉정하게 봐야 할 부분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객사들이 공급망 다변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점, 그리고 경쟁사들이 비슷한 기술을 구현하는 속도가 예상보다 빠를 경우 점유율이 하락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AI 인프라에 대한 빅테크의 설비 투자가 둔화되는 시나리오 역시 리스크 요인으로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저는 이 두 가지 시각을 모두 유효하다고 봅니다.
반도체 후공정 장비 불모지에서 출발한 한미반도체가 세계 1위 자리를 지켜온 과정은 단순한 성공 스토리 이상입니다. 기술에 대한 확신을 행동으로 옮긴 사례라는 점에서 투자자뿐 아니라 사업을 일구는 분들에게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남깁니다. 지금 당장 투자를 결정하기 전에, 이 회사가 어떤 구조로 돈을 벌고 어떤 리스크를 안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해 보시길 권합니다.
이 글은 개인적인 경험과 의견을 공유한 것이며, 전문적인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