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I용 고대역폭 메모리 HBM의 높이 규격이 완화될 가능성이 나오고 있다. 국제 반도체 표준 협의기구 JEDEC이 HBM 높이를 현행보다 최대 900마이크로미터까지 허용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현재 HBM3가 720마이크로미터, HBM4가 775마이크로미터인 점을 감안하면 최대 15% 이상 높아지는 셈이다. 반도체 투자를 처음 시작했을 때 나는 기술 용어에 압도당했다. HBM, TC 본더, 하이브리드 본더 같은 단어들이 뉴스에 나올 때마다 그냥 넘겼다. 어차피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주가가 오르면 되는 거 아니냐는 식이었다. 그런데 그 무지함이 실수로 이어졌다. 한미반도체를 처음 접했을 때 단순히 장비주라는 이유로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이후 HBM 수주 모멘텀이 붙으면서 주가가 크게 오르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때 깨달은 게 있다. 반도체 투자는 완성품 기업만 보는 게 아니라 그 기업이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어떤 장비와 소재로 만들어지는지, 그 밸류체인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번 규격 완화 이슈도 처음에는 단순한 기술 변경처럼 보였지만, 수율, 본딩 장비 수요, 후발주자 경쟁까지 연결되는 구조를 파악하고 나서야 이게 얼마나 넓은 파급 효과를 가진 뉴스인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규격 완화가 수율 개선으로 직결 되는 이유
HBM은 D램을 수직으로 쌓아 올리는 구조다. 현재 12단까지 상용화됐고, 앞으로는 16단, 20단으로 더 높게 쌓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적층 수가 늘어날수록 한 번에 처리할 수 있는 데이터 용량이 커지기 때문이다. 문제는 높이 규격이 엄격하면 D램을 더 얇게 만들거나 층 사이 간격을 줄여야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되면 메모리 업체들의 기술 부담이 커지고, 패키징 단계에서 수율 확보가 더 어려워진다.
규격이 완화되면 공정 여유가 생긴다. 메모리 업체 입장에서는 같은 적층 수를 더 안정적으로 양산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엔비디아 같은 고객사의 요구를 충족하면서 양산 속도를 높일 수 있는 구조가 된다. 지금 HBM 공급 부족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번 규격 완화가 병목 현상을 일부 해소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는 반도체 투자를 할 때 기술 지표보다 수율에 더 주목하는 편이다. 수율이 오르면 같은 공장에서 더 많은 양품을 뽑을 수 있고, 이는 곧 실적 개선으로 이어진다. 이번 규격 완화가 수율 개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긍정적인 신호로 읽힌다.
후발주자들의 위협
규격 완화가 모든 메모리 업체에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점에서 중국 후발주자들의 진입 장벽이 낮아진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로 중국의 양쯔 메모리 테크놀로지와 창신 메모리 테크놀로지 같은 업체들이 거론된다. 하지만 냉정하게 따져보면 이 우려는 현시점에서 과도하다는 게 업계의 시각이다. 중국 업체들은 올해 HBM3 양산을 목표로 하는 단계에 불과하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4, HBM4E를 논의하는 시점과 비교하면 여전히 몇 세대 뒤처져 있다.
다만 나는 이 부분에서 한 가지 비판적인 시각을 덧붙이고 싶다. 기술 세대 차이와 고객사 신뢰 관계를 근거로 위협이 과도하다고 일축하는 분위기가 우세하지만, 과거에도 중국 업체들의 추격 속도를 과소평가했다가 뒤통수를 맞은 사례가 반도체 업계에 여러 번 있었다. 당장은 위협이 제한적이더라도 3~5년 뒤 그림이 어떻게 바뀔지는 계속 주시해야 한다. 지금 당분간은 괜찮다는 말을 너무 편하게 받아들이는 건 경계해야 한다. HBM 경쟁력이 단순히 적층 기술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는 점은 맞지만, 기술 격차가 좁혀지는 속도가 예상보다 빠를 수 있다는 가능성도 항상 열어두어야 한다.
TC 본더 수요 연장과 하이브리드 본더 도입 지연
HBM을 쌓기 위해서는 본딩 기술이 필요하다. 현재 주류는 디램과 디램을 열과 압력으로 접합하는 TC 본더 방식이다. 16단, 20단 이상의 고적층 HBM 공정에서는 각 층 사이의 돌기인 범프의 높이를 줄이기가 어려워지면서 TC 본더의 한계가 지적돼 왔다. 이에 한미반도체나 하나마이크론 같은 업체들이 범프 없이 디램을 직접 연결하는 하이브리드 본더를 개발해 왔다.
이번 HBM 높이 규격 완화가 이 흐름에 제동을 걸 수 있다. 높이 여유가 생기면 메모리 업체들이 당장 하이브리드 본더를 도입할 필요성이 줄어든다. 하이브리드 본더는 기존 TC 본더보다 두 배 이상 비싸고 기술 난도도 높기 때문이다. 업계에서는 하이브리드 본더의 양산 시점이 5년가량 늦춰질 것으로 보고 있다. 이 부분을 단순히 한미반도체에 좋은 뉴스로만 읽으면 절반만 본 것이다. 하이브리드 본더를 개발해온 업체들 입장에서는 시장 진입 시점이 뒤로 밀리는 셈이고, 그동안 투자한 R&D 비용이 더 오랜 기간 잠겨 있게 된다. 단기적으로는 글로벌 TC 본더 1위인 한미반도체 중심의 시장 구도가 유지되지만, 엔비디아 같은 주요 고객사가 HBM 성능 향상을 강하게 요구할 경우 하이브리드 본더 도입 시점이 앞당겨질 수 있다는 변수는 계속 주시해야 한다. 기술 투자를 이해하지 못하면 이런 흐름의 변화를 놓친다는 걸 한미반도체 사례에서 처음 배웠다.
📌 요약
HBM 높이 규격 완화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수율 개선과 양산 속도 향상에 긍정적으로 작용한다. 중국 후발주자의 진입 장벽이 낮아진다는 우려가 있지만 현시점에서는 기술 세대 차이가 크고, 다만 추격 속도를 과소평가하지 않는 시각도 필요하다. 본딩 장비 시장에서는 하이브리드 본더 도입 시점이 늦춰지면서 TC 본더 1위 한미반도체 중심의 구도가 당분간 유지될 전망이다.
본 글은 투자 권유가 아니며, 투자 판단과 그에 따른 책임은 본인에게 있습니다.